생각하기..
25년만의 고백 - 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(1)
화가와어부
2006. 5. 18. 22:31
퍼온 글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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내가 군에 입대한 것은 1979년 5월이었다. 공수 교육과 특수전 교육(구체적으로는 게*릴라 침*투나 사회 소*요에 대비한 훈련)을 마치고 특전사령부 예하 여단에 배치된 것은 9월 말 경이었는데, 다음 달 10월에 대통령 시*해 사건이 일어나고, 이어서 12 · 12 사*태가 발생하면서 특전사 장병들은 당시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던 신군부 세력의 기반이 되어 자신들도 모르게 엄청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.
시*해 사건이 있고 난 후 전*쟁 경계령인 데프콘Ⅲ가 발동되자 강원도 화천의 최전방 공수여단에서 근무하던 나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긴장된 군생활을 해야 했다. 더구나 12· 12 사태 후 신군부 세력의 집권 의지가 드러나면서 일어난 1980년 봄의 수많은 소*요와 혼*란은 이를 진*압하기 위해 투입될 공수 요원들의 생활과 훈련을 한없이 고달프게 만들었다. . 게다가 정신 교육을 통해 대학생들에 대하여 들은 것이라고는 그들이 모두 좌*경 용*공 분*자들이라는 것뿐이어서 자연히 적*개심을 가지게 되었고, 이것이 훗날 광주에서의 끔찍한 학*살을 서슴지 않게 한 심리적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.
1979년 12월 30일 경 종무식을 하면서 연초 3일간의 휴무에 들어갈 때 마지막 종회 시간에 들어온 중대장의 상기된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. 당시 공수 요원들은 점프(낙하) 수당으로 일반 보병 부대의 병사들보다 많은 봉급을 받고 있었는데, 정확히 기억은 못하지만 새해부터는 특전 병사들을 200%의 봉급과 500%의 점프 수당 인상이라는 파격적인 대우 향상을 약속한다는 것이었고,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들뜨고 즐거워하던 부대원들의 모습이 기억난다. 당시 일병이었던 나도 그 이야기를 믿고 나의 봉급을 계산하니 꽤 큰 액수여서 군생활을 하면서 돈을 좀 모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…… 아마 이러한 조치들은 특전 요원들을 자신의 충성스런 친위대로 만들기 위해 신군부 세력이 의도한 선심이었을 터이다.
그러다 강원도 화천에 있던 우리 여단이 서울로 대대적인 부대 이동을 한 것은 1980년 5월 초 무렵으로 기억된다. 이는 잠시 시위 진*압을 하기 위해 출동하는 게 아니라 아예 장기적인 주둔을 목적으로 한 출발이었다. 매년 7, 8월이 되면 공수 부대 원들은 바닷가로 나가 몇 주씩 수영 교육을 받는데. 봄에 부대를 옮기면서 수영 교육준비까지 하고 가라는 명을 받았으니, 이는 시*위를 진*압하고는 부대로 복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, 앞으로 있을 비상 계엄과 그 이후의 일들을 계산한 장기적인 계획이 있었음을 뜻하지 않는가?
5월이 되자 공수 요원들은 신발끈도 풀지 못하고 전투복도 벗지 못한 채 잠을 자며 언제라도 출동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해야만 하였다. 또 비상 계엄이 선포되기 며칠 전인가는 특전사령관이 공수여단 산하의 모든 부대에 1,500만원씩의 하사금을 내려 우리 대대에서도 400만 원을 받아 돼지를 잡고 술을 마시며 큰 회식을 한 일도 있었다. 그곳에서 대기하며 우리는 정신 교육을 받기도 하였는데, 강사는 부마 사*태를 진*압한 여단의 한 부대장이었다.
그는 자신들이 얼마나 무*자비하고 단호하게 시*위를 진*압하였는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고 부대원들 역시 그것을 영웅시하는 분위기였다.
우리 여단이 급히 광주로 내려가게 된 것은 다음날인 18일 오후5시 경이었다.
새벽 2시경에 도착해 보니 광주였고, 우리가 들어간 곳은 조선대학교였다. 거기에는 이미 숙소가 마련되어 있었다. 피로에 지친 우리는 대충 짐을 정리한 후 3, 4시경에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. 몇 시간이나 잘 수 있었을까? 아침 식사도 끝내기 전에 갑자기 출동명령이 떨어져 우리는 급히 단독 군장을 하고 총*검을 꽂고 군용트럭에 탑승하여 소위 무*력 시*위라는 것을 하여야했다.
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전라북도 금마에 있던 한 공수여단이 어제 광주에 들어왔는데 의외로 대학생들의 저항이 거세었고, 이에 강경하게 맞선 공수여단의 진*압으로 말미암아 시민들 상당수가 다치고 여론이 나빠지니까 그들을 대전인가로 빼고 우리를 대신 투입했다는 것이다. 우리 부대가 처음 광주에 도착한 19일 오전은 전날의 잔*혹한 진*압 때문인지 학생들의 시*위가 있기는 했지만 간혹 몇백 명쯤 모여 구호를 외치다 군인들이 쫓아가면 도망할 뿐 그렇게 격*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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내가 군에 입대한 것은 1979년 5월이었다. 공수 교육과 특수전 교육(구체적으로는 게*릴라 침*투나 사회 소*요에 대비한 훈련)을 마치고 특전사령부 예하 여단에 배치된 것은 9월 말 경이었는데, 다음 달 10월에 대통령 시*해 사건이 일어나고, 이어서 12 · 12 사*태가 발생하면서 특전사 장병들은 당시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던 신군부 세력의 기반이 되어 자신들도 모르게 엄청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.
시*해 사건이 있고 난 후 전*쟁 경계령인 데프콘Ⅲ가 발동되자 강원도 화천의 최전방 공수여단에서 근무하던 나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긴장된 군생활을 해야 했다. 더구나 12· 12 사태 후 신군부 세력의 집권 의지가 드러나면서 일어난 1980년 봄의 수많은 소*요와 혼*란은 이를 진*압하기 위해 투입될 공수 요원들의 생활과 훈련을 한없이 고달프게 만들었다. . 게다가 정신 교육을 통해 대학생들에 대하여 들은 것이라고는 그들이 모두 좌*경 용*공 분*자들이라는 것뿐이어서 자연히 적*개심을 가지게 되었고, 이것이 훗날 광주에서의 끔찍한 학*살을 서슴지 않게 한 심리적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.
1979년 12월 30일 경 종무식을 하면서 연초 3일간의 휴무에 들어갈 때 마지막 종회 시간에 들어온 중대장의 상기된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. 당시 공수 요원들은 점프(낙하) 수당으로 일반 보병 부대의 병사들보다 많은 봉급을 받고 있었는데, 정확히 기억은 못하지만 새해부터는 특전 병사들을 200%의 봉급과 500%의 점프 수당 인상이라는 파격적인 대우 향상을 약속한다는 것이었고,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들뜨고 즐거워하던 부대원들의 모습이 기억난다. 당시 일병이었던 나도 그 이야기를 믿고 나의 봉급을 계산하니 꽤 큰 액수여서 군생활을 하면서 돈을 좀 모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…… 아마 이러한 조치들은 특전 요원들을 자신의 충성스런 친위대로 만들기 위해 신군부 세력이 의도한 선심이었을 터이다.
그러다 강원도 화천에 있던 우리 여단이 서울로 대대적인 부대 이동을 한 것은 1980년 5월 초 무렵으로 기억된다. 이는 잠시 시위 진*압을 하기 위해 출동하는 게 아니라 아예 장기적인 주둔을 목적으로 한 출발이었다. 매년 7, 8월이 되면 공수 부대 원들은 바닷가로 나가 몇 주씩 수영 교육을 받는데. 봄에 부대를 옮기면서 수영 교육준비까지 하고 가라는 명을 받았으니, 이는 시*위를 진*압하고는 부대로 복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, 앞으로 있을 비상 계엄과 그 이후의 일들을 계산한 장기적인 계획이 있었음을 뜻하지 않는가?
5월이 되자 공수 요원들은 신발끈도 풀지 못하고 전투복도 벗지 못한 채 잠을 자며 언제라도 출동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해야만 하였다. 또 비상 계엄이 선포되기 며칠 전인가는 특전사령관이 공수여단 산하의 모든 부대에 1,500만원씩의 하사금을 내려 우리 대대에서도 400만 원을 받아 돼지를 잡고 술을 마시며 큰 회식을 한 일도 있었다. 그곳에서 대기하며 우리는 정신 교육을 받기도 하였는데, 강사는 부마 사*태를 진*압한 여단의 한 부대장이었다.
그는 자신들이 얼마나 무*자비하고 단호하게 시*위를 진*압하였는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고 부대원들 역시 그것을 영웅시하는 분위기였다.
우리 여단이 급히 광주로 내려가게 된 것은 다음날인 18일 오후5시 경이었다.
새벽 2시경에 도착해 보니 광주였고, 우리가 들어간 곳은 조선대학교였다. 거기에는 이미 숙소가 마련되어 있었다. 피로에 지친 우리는 대충 짐을 정리한 후 3, 4시경에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. 몇 시간이나 잘 수 있었을까? 아침 식사도 끝내기 전에 갑자기 출동명령이 떨어져 우리는 급히 단독 군장을 하고 총*검을 꽂고 군용트럭에 탑승하여 소위 무*력 시*위라는 것을 하여야했다.
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전라북도 금마에 있던 한 공수여단이 어제 광주에 들어왔는데 의외로 대학생들의 저항이 거세었고, 이에 강경하게 맞선 공수여단의 진*압으로 말미암아 시민들 상당수가 다치고 여론이 나빠지니까 그들을 대전인가로 빼고 우리를 대신 투입했다는 것이다. 우리 부대가 처음 광주에 도착한 19일 오전은 전날의 잔*혹한 진*압 때문인지 학생들의 시*위가 있기는 했지만 간혹 몇백 명쯤 모여 구호를 외치다 군인들이 쫓아가면 도망할 뿐 그렇게 격*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.